오늘도 마찬가지로 '세이노의 가르침' 책 중에서 인상 깊었던 챕터를 리뷰하고자 한다. 이번 챕터에서 중요하게 봐야할 키워드는 바로 '성장'과 '행복'이다. 이전에도 행복과 관련된 내용들을 여러 번 포스팅 했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그 내용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혹시 '세이노'가 누구? 일본사람인가? 하는 분들은 지난 포스팅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변화가 없는 삶은 불행하다
- 부자들에게는 불행하고 가난하였던 과거가, 나의 경우도 그렇듯이 종종 훈장처럼 따라 다닌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담은 불행한 상황을 자기 힘으로 역전시켜 행복한 상황으로 만든 사례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하여 끼니 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는데 노력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곧 그들의 삶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었음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푸세식 변소에서 냄새를 참으며 용변을 보던 사람이 수세식 양변기에서 쾌적하게 용변을 본다고 해서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돈이 많아지면 불편하고 구차한 환경이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변할 뿐이다. 생활수준이 높다고 해서 높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비슷한 예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공부를 열심히 하여 유명한 대학에 들어갔다거나 수년간 어렵게 공부하여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성공담과 관련하여서도 나타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불행 끝, 행복 시작”의 사례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좋은 학력을 갖게 되었을 뿐이고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하였을 뿐이다. 그렇게 하여 이 사회에서 얻게 될 대가가 좀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행복의 필수조건으로 착각하지는 말라.
-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보여주고 나서 “꿈을 가져라” 혹은 “야망을 가져라”고 말하는 것은 종종 마치 명예나 지위, 돈, 학벌 등에 대한 꿈과 야망이 성취되어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이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성공하게 되면 기쁨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기쁨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잠시 뿐이며 그 어떤 성공이건 간에 결코 행복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목표가 성취되면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뿐이지 그 성취감이 행복과 동의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갔다고 해서 행복해졌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 그러므로 TV 프로그램 ‘성공시대’(이미 방송이 끝났지만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므로 가능한 많이 보아라)나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본받아 “나도 저렇게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저런 사람이 안 되면 내 삶은 불행하여진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분명히 말한다. 그 어떠한 실패도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그 어떤 삶도 열등하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 내가 가진 자로서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못 가진 자와 실패한 자를 “못난 놈”,“ 불행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내가 철저하게 비난하고 꾸짖는 대상은 시간을 우습게 여기는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져 자기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서도 돈과 성공과 행복을 아주 “편안하게”꿈꾸는 사람들이다. )
-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반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한다면,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유형의 것이건 무형의 것이건 상관없이 그 양과 질이 증가하는 과정이 계속될 때 얻어진다. 미국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 David G. Myers) 역시 ‘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appiness : Discovering the Pathway to Fulfillment, Well-Being, and Enduring Personal Joy)에서 “고정된 고소득보다는 소득이 증가하는 상태가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소득의 많고 적음 그 자체가 아니라 소득이 매년 오르고 있을 때 인간은 행복을 더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매년 연봉 백만달라를 계속 받는 사람 보다는 10만 달라의 연봉이 매년 증가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한 가지 더 붙이고 싶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스스로 일으켜 그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신의 가치를 계속 증대시켜 나갈 때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말이다.
- 양귀자 의 소설 ‘모순’에서 주인공인 25세 여성 안진진의 이모는 심심해하는 부유층 사모님이다. 돈도 잘 벌고 착실하기까지 한 멋쟁이 신사 남편을 둔 이모는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이 넘쳐 나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 잘 살던 이모가 너무나 행복한 일상에 지쳐 자살한다. 부자였지만 삶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이 종종 자살하는 이유 역시 삶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고 나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나의 미래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오판하고 그런 자살 시도를 하였었다.
- 토머스 제퍼슨은 “행복의 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했다. 그 권리를 누리려면 스스로의 변화를 먼저 주도하라. 남이 하면 따라 하고 남이 좋다면 따라서 좋다고 박수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뿌듯하여 질 수 있는 주체적 삶을 찾아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은 이미 생명이 죽은 삶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에 익숙하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당신이 버는 돈의 액수가 작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천만의 말씀이다. 당신이 돈을 얼마나 벌든 간에 삶에 변화가 없고 뿌듯함이 없다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키고 증가시키는 노력을 할 때 행복은 매일같이 주어지는 법이며 덤으로 뿌듯함 마저 느끼게 된다.
- 문제는 여기서 그 변화의 방향을 어느 쪽에다 두는가에 있다. 그 방향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그 하나는 이 사회에서 대가를 더 많이 받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변화를 줄 수 있는 지식들을 추구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사회에서 대가를 받는 것과는 관련 없이 인간으로서의 성숙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참선을 하면서 자기를 바라 본다거나‘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생을 배운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 돈과 관련되지 않은 것에 그 방향을 두고 있다면 당연히 돈은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변화가 주는 뿌듯함은 곧 돈 문제로 인하여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인들처럼 자족과 감사의 생활을 영위하며 살 “자신이 있다면”( 사도 바울 같이 말이다) 계속 그렇게 돈과 거리를 두고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가치 있는 삶의 한 형태라고 나는 믿는다.
- 그러나 이 사회에서 대가를 더 받는 쪽에다 변화의 방향을 두고 있다면 그 대가 자체 보다는 변화의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 관심을 두어라. 그렇게 하면 행복감과 뿌듯함을 매일 맛 볼 수 있고 돈은 저만치에서 뒤따라 오게 된다.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여 삶과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 언제나 나는 뿌듯함과 행복감에 충만하였다.
- 30대 초에 내가 컴퓨터와 씨름을 하다가 새벽 4시에 사무실을 나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던 집으로 가면서 어둠 속에서 느꼈던 그 가슴 뿌듯함을, 20대에 내가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새벽녘이 밝아오는 가운데 끝냈을 때 느꼈던 그 환희에 찬 뿌듯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돈? 돈은 그 뒤에서 성큼성큼 따라왔다.
- 비록 당신은 돈이 뒤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정말인가 의심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겠지만 내 말을 믿으라.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이미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변화가 싫다고? 지금 그 상태로 있는 게 좋고 행복하다고? 내가 알기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 무소유 신봉자, 신실한 신앙인 세 종류 뿐이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변화 없이 사는 게 좋고 행복하다면 내게 그렇게 사는 비결 좀 알려다오. )
내 인생에서 가장 한심했던 시기에서 배운 것
이번 챕터를 읽으면서 나의 20대 초반이 떠올랐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하기까지의 수개월의 시간인데, 내 인생에서 가장 한심하게 보냈던 날들이라고 생각하는 시기이다. 당시에 어차피 학교도 복학해야하고 군대도 다녀왔기 때문인지 부모님께서도 별다른 말씀을 안하셨는데,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을 많이 자고 싶었다. 군대에서는 항상 잠이 부족해서 괴로웠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루에 10시간씩 자다가 잠도 계속 자니까 점점 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하루에 15시간씩 잤던 것 같다. 그쯤되니 잠을 잔다기 보다는 그냥 하루 종일 잠에 취해있는 상태로 있었다. 오후 늦게쯤 잠에서 깨면 씻지도 않고 컴퓨터하다가 대충 먹고 또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했다.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3달 정도 지내보니 거의 폐인 수준이 되었는데 그쯤되니까 너무나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같은 곳에서 사지 멀쩡해보이는 노숙자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살지? 나가서 막노동이라고 하면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살아보니 그들이 왜 일을 못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무기력해서 일을 할 수 있을만한 에너지가 없었고, 솔직히 일은 커녕 밖에 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말 그대로 폐인 상태였는데, 어느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이렇게 살면 진짜 인생 종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알바 자리를 알아보고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중 한 곳에서 일자리를 줘서 알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바를 하면서 빠르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때가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3~4개월 정도의 기간이 기억에 생생하다. 내게는 정말 많은 교훈을 안겨준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는 삶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 처음 1~2주 정도만 좋았다. 그 뒤로는 시간이 갈수록 즐거움보다는 그냥 아무 생각없는 시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삶은 '삶'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도 무색한 죽어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마음이 나태해지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질 때면 그 때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고는 한다. '막상 그렇게 지내보면 좋을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나?' 라고 되뇌이면서.
발전이 없는 삶은 즐거움도 없다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경험이니까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어 매일 매일 사고 싶은 것 사고 즐기고 싶은 것 즐기면서 산다면 하루 하루가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솔직히 나도 아직 그렇게 살아보지는 않아서 실제로 그럴지 아닐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렇게 매일 지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어느 시점이 되면 비슷한 날들이 반복될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히 그 삶 또한 계속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삶이 기본값이 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처음과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번 챕터에 등장하는 '한계효용법칙'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 : 추가적으로 재화를 한 단위 더 소비했을 때 느끼는 효용은 점점 그 크기가 재화의 소비량을 늘려감에 따라 이전에 비해 감소한다는 것. 예를 들어, 격렬한 운동을 한 뒤 스포츠 음료를 한 캔씩 마신다고 했을 때, 맨 처음 마신 음료수가 가져다주는 효용은 상당히 클 것이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음료수를 두 캔째 마시면, 아무리 동일한 음료수를 똑같이 1캔 더 먹었다 한들, 두 번째 음료수 한 캔이 가져다주는 효용은 첫 번째 음료수 한 캔이 가져다 준 효용보다 적을 것이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음료수가 가져다 주는 청량감은 아무래도 첫 번째 음료수가 가져다 주는 청량감에 비해 작을 공산이 크다는 말이다. 출처 : 나무위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이전에 리뷰했던 책 '클루지'에서도 나온다. 그 책에 따르면 진화적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 인간 마음의 가장 뿌리 깊은 속성 중 하나는 바로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든 거기에 익숙해지는 경향이다. 이것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는 순응이다. 예컨대 사무실 밖에서 트럭이 요란하게 덜거덕거리면 처음에는 귀에 매우 거슬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이것이 순응이다. 어떤 것이 일정하다면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새로운 물질적 재화는 종종 엄청난 초기 만족을 가져다주지만 우리는 이내 그것에 익숙해진다.
- 진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부 작용을 이해하든 말든, 심지어 우리가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행복은, 또는 더 정확히 말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 이상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진화는 우리가 행복하도록 우리를 진화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진화시켰다.
또한, 역시나 이전에 리뷰했던 켈리 최의 '웰씽킹'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책에서 켈리 최 역시 세이노가 말했던 것처럼 꾸준히 성장할 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속 성장하는 행복한 부자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자신이 왜 부자가 되고 싶은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돈도 있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잊지 마라. 무엇보다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공헌해야 오랫동안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변화'와 '성장'이다
그래서 이미 이룰거 다 이루고 가질거 다 가진 것 같은 사람들도 끝없이 일을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자기계발을 하거나 등등.. 바쁘게 사는 것이다. 나도 한 때는 "저렇게 돈도 많이 벌고 이룰거 다 이룬 사람들이 왜 계속 욕심을 부리지? 은퇴해서 편하게 하루 하루 즐기며 살면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돈독이 올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그중에는 돈을 버는 것 자체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성장시킬 수 있고 내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살면서 끊임없이 추구하더라도 내가 계속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예를 들어 나의 경우엔 가족들과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기쁨, 배움을 통해 성장한다고 느끼는 기쁨, 다른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느끼는 기쁨 등이 그것이다), 어차피 우리의 행복이 오래갈 수 없도록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다면 순간적인 쾌락을 주는 '가짜 행복'이 아닌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긍정적인 행복들을 추구하는 것이 내 삶을 위해서 훨씬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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