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수출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을 수용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어려워져버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은 잘 숙지하면서, 스스로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질문보다 대답을 위주로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주로 과거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버리거나 진위 논쟁으로 빠져버린다.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다. 한마디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사람은 기존의 믿음 체계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다. 고독한 존재다. 문명의 깃발로 존재하는 철학이나 예술은 다 고독한 존재들의 용기에서 비롯된다. 자신만의 능력으로 세상에 질문을 제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반면 종속적인 사람에게는 질문보다 대답이 더 편하다. 질문은 집단에서 이탈하는 용기를 발휘할 때 가능하다.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집단에서 이탈하여 자기로 우뚝 설 수 있다.
생각을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은 삶을 자발적으로 운영한다는 말이 되고, 반면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용해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추종하며 산다는 말이 된다.
질문의 힘
이 책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는 '질문'을 강조한다. 이는 '주체'로서의 삶과도 맞닿아있다.
이 책에 따르면 질문은 내안의 호기심과 욕망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으로써 내가 나로서 존재할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나는 질문을 할 때 비로소 주체적일 수 있다. 시대를 이끌어갔던 사람들과 모든 선도적인 기업들은 대답이 아닌 질문을 던졌다. '왜' 휴대폰과 MP3, 인터넷을 각각 써야하는가? 모두를 하나의 기기에서 통합해서 쓸 수는 없는것인가? 이런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결과 '스마트폰'이라는 창조와 혁신이 발생했다.
반면에 종속적인 사람들은 익숙한 것들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질문하지 않고 대답을 한다.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을 내어 놓는 일로써 거기에 '나'는 없다. 대답만 하는 사람들은 선도력을 가질 수 없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따를 뿐 자신이 기준의 생산자가 될 수 없다. 기준의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조차 하지 못한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종속적인 삶을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기능적 고착
'기능적 고착'은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한 대상을 그것의 가장 일반적인 한 가지 사용법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지각하여 다른 기능으로의 사용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파트에서 여러 개의 짐 상자를 옮기고 있는데 문을 고정하는 장치가 없어서 매우 불편하다 느끼면서도 그 상자 중 하나를 문을 고정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나, 동전이 비상시에 드라이버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우리의 지각이 얼마나 익숙한 방향으로 경직되어 있는지를 말해준다.
다음의 문제를 보자.
부자지간인 두 남자가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트럭 한 대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와서 충돌하는 사고가 났다. 운전을 하고 있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고, 아들은 크게 다쳐 응급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외과의사가 차트를 보더니
"난 이 응급환자를 수술할 수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라며 절규했다.
여기서 의사와 아들은 어떤 관계일까?
아주 간단한 문제이지만 이 문제에 쉽게 답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즉사한 사람은 양아버지이고 의사는 친아버지인가?"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답은 어머니와 아들이다. 이는 우리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한지를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 뇌는 편함을 추구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의 뇌는 이미 많은 것들을 정해놓고 자동적으로 판단을 해버린다. 그렇게 해야 사용되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뇌는 최고의 성능을 내기 보다는 적당한 수준의 성능을 내면서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그것이 원시시대의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뇌의 자동적인 처리 시스템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편하다. 고민할 일이 없기 때문에 에너지가 거의 들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주체적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많은 에너지를 써야한다는 말이 된다. 질문하고 관찰하고 기존의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의 생산자가 된다는 것은 기존의 방식에 순응하며 사는 삶에 비해서 수십 수백배는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다. 피곤하고 힘든 삶이다.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까?
사실, 이렇게 힘들게 살라고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순응하며 사는 삶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교육 체계를 보면 질문을 잘 하는 학생을 만들기보다는 대답을 잘하는 학생을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것 처럼 보인다. 사회에 나와서도 상사들은 대답을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질문을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매사에 불편하고 예민하고 질문하는 사람은 오히려 우리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피곤한 존재일 수 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도 괴팍한 성격으로 인해 인간적으로는 그다지 선호되는 인물이 아니었다고 알려져있다.
여기까지 읽고나서 "난 그런 복잡한거 모르겠고, 그냥 편하게 살래."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존중한다. 그 삶 역시 자신의 삶이다. 나도 아직 뭐가 정답이라고 선뜻 답을 못내리겠다. "기왕 태어난 삶이니 힘들지만 그래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보는게 맞지 않겠나?" 라고 이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왜 굳이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야돼? 난 그냥 지금 이대로도 행복한데?"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딱히 해줄 말이 없다.
나는 오늘 하루를 '잘' 살았는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본인 스스로는 답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하루 종일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 알고리즘이 정해주는대로 영상들을 보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덥잖은 글들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면 잠들기 전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밀려온다. 본인 스스로는 잘 아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잘' 살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 순응하는 삶, 변화가 없는 삶은 편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속에서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낄 때,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느낄 때 '행복감'을 갖는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불편함과 힘듦을 동반한다. 익숙함은 '안정감'을 주지만 그게 행복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잘' 산다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를테니 결국 정답은 없다. 지금 자신이 충분히 행복하다면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본인이 누구보다 답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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